드디어 만난 스티븐 제이 굴드. 리처드 도킨스의 입으로부터 상상했던 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그였다. 차갑고 독설적이며 냉정하고도 논리적인 리처드 도킨스와는 다르게 그는 부드럽고 상냥하게, 물 흐르듯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갔다. 어쨌든 그와의 첫 만남은 도킨스를 처음 만났을 때 만큼이나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대략 한 300페이지 동안 시종일관 그는 '진화는 진보가 아니다'를 외친다. 인간이 우월한 종임을 원하는 부류들이 '생명체는 좀 더 복잡한 방향으로 진보한다'라고 말하는 것을 굴드는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것은 풀 하우스(시스템 전체의 변이)를 보지 못하고 보고자 하는 것을 실체화 하여 보려 하는 플라톤적 사고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왜 더이상 4할 타자가 등장하지 않는가에 대한 분석을 비롯해 다양한 예를 통해 우리가 '풀 하우스'를 잘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이 친절하고 재밌는 책을 읽음으로써 평소 고민하던 많은 주제들에 대해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진화에 대한 시각을 송두리째 바꿔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상당한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뒤에 짤막하게 인간의 문화에 대해서 다루는 부분에 대해서는 논지가 약한부분도 없지 않아 있다. 종의 진화라는 측면에서는 더할나위 없는 설명을 펼쳐주고 있는 책이기는 하나, 에필로그로 담았던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요즘들어 인간의 문화적 진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내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다. 애초에 굴드가 이 부분을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얘기하려고 한것도 아니고 말이다.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철학, 음악, 역사, 과학, 인문을 넘나들며 과학에 대해서 재미있고 쉽고 이야기 하는 그를 만나고 싶다면, 혹은 이전에 생각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면 이 책은 후회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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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많은 인생을 살아오진 않았지만 살다보면 여러가지 어려운 일들에 부닥치게 된다. 보통 그런 일을 '하기 힘들다'라고 이야기 한다. 아마 계속해서 노력하면 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일단은 힘이 들고 마음먹은대로 잘 되지도 않는다. 반면에 정말 누워서 떡먹기라고 할 정도로 쉬운 일들도 있다. 정상적인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 예를 들면 달린다든지, 신발끈을 묶는다든지, 크게 소리내어 외친다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런데 살다보니 물리적으로는 하기 쉬운 일에 포함되는 일임에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더라. 나는 이것을 '하지 않는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할 수 없다'라고 표현하는데 그 편이 더 의미가 맞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할 수 없는 이유중 가장 강력한 것은 타인에 대한 의식 때문이다. 내가 어떤 옷을 입으면, 어떤 말을 하면, 어떤 행위을 하면 이라는 가정속에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를 제한한다. 이런 행동들은 어렸을적부터 배워왔던 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의 가르침이 많은 영향을 주는 거 같다. 너무 오랬동안 너무도 당연하다싶이 이런것들을 고려해왔다. 사실 사회적 인간으로써 살아가는 이상 고려하는 것이 당연하다. 타인을 고려치 않고 자신이 할수 있는 것을 마음대로 해버리면, 그것은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은 도덕이라 배웠고, 도덕의 모호성때문에 법이라는 것도 만들어 조금 더 강제적인 규제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너무도 많은 것들을 할 수 없지 않은가. 머리로는 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도 몸이 잘 따라주지 않지 않은가. 비가 마구 쏟아지는 날, 비를 흠뻑맞고 싶은데 밖으로 뛰쳐나가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는가. 조용히 혼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굶어본 적이 없는가. 왠지 크리스마스에는 밖에 혼자 돌아다니면 안될 것 같지 않은가.
이제는 이런 것들이 너무 싫다. 왜 내가 타인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을 내 행동들에 대해 의식하고 염려해야 하는가. 나는 조금 더 당당해지고 싶고 그로 인해 좀 더 온전한 나 자신을 찾고 싶다. 나는 사실 이런 타인의 의식을 조금씩 줄여나가는 노력을 하고 있다. 많이 힘이 들고 조금 낯부끄럽지만 큰 부상뒤에 재활치료를 하는 느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언젠가 다른사람들에게 '할 수 있으니까 하는거야'라고 당당히 말할 날이 올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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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파격적인 제목의 책이다. 사실 그래서 읽게 되었다. 요즘 많은 것들에 대해 불감을 하고 있어서 뭔가 신선한 자극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 책은 소재 측면에서 매우 신선하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은루이라는 여자가 아마라는 남자와 함께 스플릿 텅(Split tongue)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작된다. 스플릿 텅이란 혀의 앞부분을 갈라 마치 뱀의 혀처럼 만드는 행위를 일컫는다. 파격적인 소재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피어싱, SM, 문신등 일부 젊은층에서 행해지는 가학적이고 개방적인 문화들을 다루고있다.
딱히 삶의 목적도 목표도 없는 그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고있기에 살아간다. 평범한 삶 속에서 그들에게 탈출구가 되는 것은 피어싱, 문신, 섹스, 술과 같은 것들이다. 그들과 지금의 우리네들이 무엇이 다른 것인가. 분명히 달라보일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같을지도 모른다. 단지 방식의 차이일 뿐, 그들도 우리와 같은 하늘 아래에 살아가는 인간일뿐이다. 내가 그렇듯 그들도 약하고 슬프고 외로운 그런 인간일뿐이라는 것이다.
아마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던 루이의 모습이 지워지질 않는다. 비록 본명조차 기억되지 못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모든 것이었다. 언제나 함께였고 모든 것을 공유했다. 그리고 몇 가지 질문이 머리속에 떠나질 않는다. 그들은 사랑했을까.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늘어가는 시간의 무게만큼 사랑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내리기 힘들어져만 가는 것 같다. 사실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루이가 아마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다는 것. 서로의 느낌과 감정을 공유했다는 것. 그런 것들이 그들이 사랑했는지를 묻는 것보다 훨씬 중요해 보인다.
남자 두명과 여자 한명의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시시한 연애물은 아니다. 이 책에는 이 시대 청년들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야기를 적나라고 원색적인 묘사와 충격적인 소재로 그려내고 있다. 짧은 분량의 책이지만 그리 가볍지는 않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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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에게 피어싱이라는 책을 읽고 책 감상을 쓰던 도중, 문신과 피어싱에 대한 내 생각들을 짧게 정리할 필요성을 느껴 이 글을 남긴다.
문신과 피어싱을 한 사람들을 마주치면 어떤 생각을 하는가? 겁을 먹거나, 신기하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멋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일부 보수적인 어른들이 흔히 하듯, 약간의 경멸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나는 이런 것들에 대해 최대한 거부감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왜냐하면 이런 건 일종의 자기표현 그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 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과도한 문신이나 피어싱을 한 사람들을 보면 나도 '무섭다'라는 생각이 드는게 사실이지만 역시 이런건 선입견이지 않을까. 단지 조금 파격적 (파격적이라는 단어가 올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피어싱이나 문신이 수반하는 고통의 강도라든지 형태가 조금 일반적이지는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라는 이유로 사람을 쉬이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명품을 마구 걸치고 다니는 여자들을 된장녀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하게, 외적으로 드러나는 개성의 표현이 어떤 이미지를 대표한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다. 그리고 피어싱이나 문신을 하는 사람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비춰지길 스스로 의도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자기 만족? 나는 어떠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의 외적 표현? 고통으로부터 수반되는 마조히즘적 쾌락? 혹은 그밖의 어떤 것. 사실 그리 거창하리라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멋을 부리기 위해 옷을 입고 머리를 꾸미고 화장을 하는 것과 아주 흡사하게 말이다. 단지 파격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거나 부정적으로 비쳐지게 되는 건 안타까워 보인다. 지금이 상투를 하던 조선시대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어디까지 자유로워야 하는가는 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한 사람에게 부여되는 남에게 피해주지 않을 만큼의 자유는 어디까지인가. 과도한 피어싱이나 문신을 통해 거의 신체가 변형될 정도가 되면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한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다. 이는 마치 발가벗은 사람이 돌아다닐 경우 풍기문란 죄로 잡혀가는 것과 비슷한 죄의 항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정확히 규정하기는 어려운 부분이지만, 일부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한번쯤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듯 하다. 아직 한국에서는 과도한 피어싱이나 문신을 한 사람을 많이 찾아 볼 수 없지만, 일본이나 미국의 경우에는 어떨지 잘 모르겠다.
세월을 거듭해오면서 인간은 다른 인간과 차별화되려는 욕구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해왔다. 그 양상중의 하나인 문신과 피어싱. 앞으로 또 무엇이 등장하게 될까.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시각으로 그것들을 바라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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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듯,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4주간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4월 3일자 저녁 12시를 기점으로 나는 다시 민간인으로 돌아왔다. 39사단의 입구들 걸어 들어갈때와 입구를 걸어 나올때의 모습과 복장은 분명히 유사했으나 정신적으로는 뭔가 확연히 달라진 것 같았다.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해 준 시간이었고 또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된 시간이었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끔 하였고, 새로운 길을 나아갈 힘을 얻기도 하였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과 내 생각과 각오를 잊지 않기 위해 오늘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남긴다.
과거에 나는 뭔가가 결핍되어 있었다. 분명한 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꿈을 향해 내 나름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대로 이룰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한계를 그었고 상황을 탓했다. 이른바 내가불가항력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나는 자연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라는 식의 고도의 자리 합리화, 즉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회의적인 나조차도 납득시킬만한 강력한 것이어서 그것이 당연한 듯 살아오고 있었고 그것의 울타리 안에서 나름의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계획형 인간과 자유형 인간의 사이에서 고민했고 어느쪽도 크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탓할 것들을 찾아내야만 했고 그것들은 잠시간의 위안을 주었다.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변하고 싶어 하는 나였고 변하지 않은 나였다.
군대라는 곳은 엄격히 모든 것이 통제되는 생활이다. 훈련병에게는 아무런 기본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시키는대로 해야하고 그 외의 행동은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그 안에서 궁극적인 계획형 인간의 모습을 발견했다. 비록 내가 만든 계획은 아니었을지라도 나는 분명히 계획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고 하나하나 해내고 있었다. 훈련은 힘들다.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다. 근데 난 해낸다. 해냄과 해냄이 쌓이고 쌓여 시간은 알차고 빠르게 흘러간다. 그리고 고된 하루 일과속 마지막 과정인 꿀같은 잠. 마치 온몸이 내게 오늘 하루 수고했다라고 말해주 듯 근육들이 유연해지며 급속도로 빠르게 잠을 청한다. 훈련병은 하루 일과중 잘 때를 제외하고는 기대거나 눕지 않는다. 이런 바른 자세의 습관은 숙면의 추가적인 이유가 된다. 아침 역시 상쾌하다. 차가운 새벽공기를 마시며 뜀걸음을 한다. 이상적이다. 심신이 동시에 단련된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나를 자꾸 그렇게 되뇌이게 만드는 것이다. 철저하게 통제된 생활속에 자신을 단련해나가는 모습이 마치 옛 도인들이 산 속에서 무술을 갈고닦는 과정과 같다. 참고 참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얻어낸다. 참으로 간단한 원리다. 많이 봐왔던 방법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을 사용하여 성공했다.
하지만 나는 고3이후 대학생활을 하며 이 방법에 대해 회의했다. 다시 말해 눈 앞에 보이는 욕구들 앞에 꿈을 위해 인내하지 못했다. 가질 것을 다 가지고 또 다시 더 가지려 했다. 이는 분명히 좋지 않은 버릇이다. 지금까지도 내가 이 버릇을 놓지 못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젠 놓아야 한다. 4월 3일 이후로 나는 다시 철저한 계획형 인간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내 안에 모든 것들을 인내하는 연습, 아니 수양을 할 것이다. 참을 것이고 나는 얻어 낼 것이다. 내게 주어질 궁극의 마시멜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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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믿고 싶은 것들을 믿는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견이나, 조언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경험, 사색, 타인에서부터 비롯된 맹목적 확신은
스스로에게 그 누구도 끊기 힘든 강력한 사슬을 채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영원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염세적인 부류의 이야기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그럴지도 모르지만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말을 했다는 듯이 여긴다.
이런 이야기들은 일종의 사회적 터부로 치부되기도 한다.
지극히 낙관적인 이야기에 대해서도
일부 비관주의자들이 강한 거부감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강력한 믿음에 의해 형성된 베타적인 사고가 위험해지는 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때이다.
확신에 취해 쉬이 다른사람을 폄하하거나 깎아내릴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언제나 직접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과 대화를 주고 받을 때
한 방향으로만 대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겠다.
여기서 회의주의까지 넘어갈 수 있지만, 그만하련다.
요는 맹목적 믿음을 지닌 자들의 일방적 소통이다.
그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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